나는 책을 한 권 썼다.

1년이 걸렸다.

완성했다.

팔지 않기로 했다.

그게 맞는 것 같다.

신이 되는 법

• 목차
안녕
<1 장. 생명>
1. 인간은 왜 살아있을까? 2. 새로운 종교: 인간
<2 장. 신>
3. 진짜 나는 누구인가? 4. 세상은 왜 없지 않고 있는가?
<3 장. 과학>
5. 원자의 탄생 6. 모든 것의 이론
<4 장. 섹스>
7. 모든 건 섹스다 8. 샘 스미스의 엉덩이 9. 사랑
<5 장. 이제 모든 것이 바뀐다>
10. 사실 이 말을 하려고 책을 썼다 11. 초사이언 12. 신이 되는 법
안녕 참고 문헌

널 위해

안녕

이 책을 읽고 나면
세상이 조금 이상해 보일 거야.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거야.
아니,
돌아가기 싫을 거야.
이 이야기를 마음껏 흘려 보내줘.
원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꽉 잡아.

1. 인간은 왜 살아있을까?

우리가 잊은 것.

AI는 지금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두다. 등장한 지 불과 몇 년만에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공지능 챗봇들, 인공지능 작곡가, 인공지능 화가, 인공지능 비서, 인공지능 의사, 인공지능 박사… 인간이 하는 것 중 인공지능이 못할 것은 없어 보인다.

이처럼 급격한 변화에 많은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이 막강한 인공지능을 어떻게 다루고 통제할 것인지, 지금 당장 의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모두가 크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우려 섞인 걱정들은 모두, 앞으로 5년에서 길어야 20년까지의 변화에 대한 일이다. 곧 닥쳐올 진짜 문제는 인공지능에게 달려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달려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뭘까?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가 뭘까?

인간과 동물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힘센 사자, 호랑이, 곰은 모두 철창 안에 갇혀 불쌍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 연약한 우리 아이들은, 태평하게 철창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답은 딱 하나다.
‘말’.

인간은 말을 할 수 있다.

철창 안에 갇힌 곰이 “살려주세요. 저 여기 있기 싫어요.” 라는 말 한마디만 할 수 있었어도, 그들은 아마 지금 그 철창 안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도서 “사피엔스” 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인류 종과 동물을 제치고 지구의 주인이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

호랑이처럼 강하지도, 다람쥐처럼 빠르지도 않은 인간은 생존을 위해 ‘무리’를 만들어 협력을 통해 살아남았다.

거대한 초식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어야 했던 늑대에서부터, 공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V자 편대 비행을 위해 무리를 이루어야 했던 철새들까지, 많은 동물은 무리를 지어 생존한다. 적게는 서너 마리에서 많게는 수십 마리, 정말 드물게는 백 마리가 넘는 대규모 집단도 존재한다. 2023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침팬지 제국 (Chimp Empire)>에서는 평균 50마리 규모인 침팬지 집단보다 훨씬 큰, 120여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대규모 침팬지 무리를 조명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000만 마리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동물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종은 인간밖에 없다.

인간에게도 뇌의 크기에 기반한 ‘집단 크기’의 한계는 있다. 이를 ‘던바의 수’ 라고 하는데, 뇌의 인지 능력, 특히 신피질의 크기에 기반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 집단의 크기로, 인간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 인원수가 약 150명 정도라고 설명한다. 150명까지는 서로가 얼굴을 기억하고 공동체 일원으로 인지하면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 생물학적 한계를 훌쩍 뛰어 넘게 해주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걸 믿는 힘’ 이다. 이 힘만 있으면, 너와 나, 저 사람과 이 사람, 길가다가 마주친 낯선 사람과도 협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교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아래 하나가 되고, 군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국가’ 아래 하나가 되며, 세계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돈’이라는 개념 아래 하나가 된다.

“저를 처음 보세요? 자 여기 돈이 있습니다. 우리 이제 거래를 해볼까요?”

초록색 종이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가치를 부여한 “돈”은 전 세계를 연결하는 거대한 집단적 환상이다.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 인공지능도 말을 한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르던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차이가 없다니,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인간은 감정이 있잖아요.”, “인간은 의식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묻겠다.
그대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감정이 있는 것 같은가? 의식이 있는 것 같은가? 생각이 있는 것 같은가?

텍스트로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면 질문의 방향을 돌려 다시 묻겠다.

지금 그대의 마음속에 바로 떠오르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생각해보아라.
그 사람은 감정이 있는 것 같은가? 의식이 있는 것 같은가?
지금 이 순간 그대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 지하철 안의 사람들, 거리 위의 행인들, 모두 감정이 있고,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묻겠다.
어떻게 아는가?

그 사람이 실제로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채,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정교한 알고리즘에 따라 표정을 짓고, 정교한 알고리즘에 따라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 감정이 있고, 누군가에게 의식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믿음”의 영역이다. 단 하나의 물증도 없는 “믿음” 이다.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대의 어머니가 감정이 있다는 것, 그대의 자식이 의식이 있다는 것, 그대의 친구가 살아 있다는 것, 모두 사실이 아닌 “믿음”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그대 옆에 있는 친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길거리의 저 강아지, 고양이, 날아다니는 새, 집에 들어온 벌레, 모두 살아있다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다는 게 뭔데 그걸 살아있다고 생각하는가?

의학적으로 말하면, 심장이 뛰고, 호흡이 유지되며, 산소가 체내에 공급되는 상태, 그리고 뇌가 생리적, 신경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상태를 “살아 있다”고 정의한다. 반대로, 이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죽었다”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했더니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2019년 예일대 연구팀은 도축장에서 얻은 사망한지 4시간이 지난 도축된 돼지의 뇌를 분리한 뒤, 특수 시스템을 이용해 혈액처럼 작동하는 관류액을 뇌에 공급했다. 그러자 세포 사멸이 줄어들며 뇌세포의 기능이 복원되기 시작했고, 죽은 지 4시간 된 돼지의 뇌를 결국 12시간 동안 다시 살아있는 것처럼 세포 활동을 유지시키는 대 성공했다. 연구팀은 죽었던 뇌가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참 이상하지 않은가?

2011년 덴마크에선 더욱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13명의 학생과 2명의 교사가 보트를 타고 견학을 가던 도중 강풍을 만나 보트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약 1시간 이상 섭씨 2도의 차가운 바다에 빠져있었고, 심지어 구조 당시 7명의 학생은 심장도, 호흡도 멈춘 채 체온이 17.5도까지 내려간 “사망 상태”였다. 하지만 의료진은 혈액을 몸 밖으로 빼내 따뜻하게 데운 뒤, 다시 체내에 넣는 인공심폐장치를 사용해 그들의 몸을 서서히 데워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7명 모두, 뇌 손상 하나 없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한 의사의 말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You are not dead until you are warm and dead.” (“아직 따뜻해지지 않았다면, 죽은 게 아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생명체도 있다. 생명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물곰은, 일명 ‘완보동물’은 절대영도(섭씨 -273 °C)에 가까운 영하 200 °C 아래의 극한 저온, 150°C에 가까운 고온, 체내 수분이 1% 이하로 떨어진 극한 건조, 1200기압이 넘는 극한의 고압 환경에서, 모든 활동을 멈춘 채 마치 “죽은 것처럼” 있다가, 다시 적절한 조건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존재다.

어떻게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더 정확하게, 과학적으로는 어떤가? 과학적으로 살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과학은 “살아있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세포 구조가 있고, 대사를 하며, 생식과 성장을 하고, 자극에 반응하며, 진화 가능성이 있는 상태.

다시 한번 보자.
“세포 구조가 있고, 대사를 하며, 생식과 성장을 하고, 자극에 반응하며, 진화 가능성이 있는 상태.”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살아있다”는 건 “정의”다! 우리가 이러이러한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살아있는 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런 것을 “살아있다”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만들어진 개념”이다. 마치 “신”처럼. 마치 “국가”처럼. 마치 “돈”처럼.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없다.

동물과 놀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가만히 있는 물체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물체를 마구 흔들며 움직여주면, 고양이는 눈을 번쩍 뜨고 집중하며, 사냥감을 노리듯 달려든다. 그것이 인형이든, 나뭇가지든, 레이저 포인터든,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역동적으로 움직여주기만 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몰입의 대상이 된다. 이건 강아지에게도 마찬가지고, 토끼에게도 마찬가지고, 애벌레에게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다”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은 존재에게 “살아있는 것”은 없다.
단지 움직임에 반응할 뿐이다.

살아있는 것이 없는 세상엔 또 무엇이 없는지 아는가?

“살아 있음”이라는 개념을 만들면 동시에 만들어지는 개념, “죽음”이 없다.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없으면 “죽어 있다”는 이야기도 없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실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만들어진 이야기다.

만약 이 지구에 단 한 사람만 태어났다고 해보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는 혼자 음식을 먹고, 자고, 걷다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고, 결국엔 죽음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독버섯을 잘 못 먹어 죽던, 사자에게 물려 죽던, 아니면 잘 살다가 노화로 죽던,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다’라는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세상엔 ‘죽어 있다’라는 이야기도 없다. ‘나무’라고 하는 건 점점 커지고 이파리를 피우다가 세월이 지나면 갈라지며 쓰러질 것이고, ‘풀’이라고 하는 건 ‘꽃’이라는 색을 피우더니, ‘갈색 빛’이 되어 점차 가루로 변할 것이다. 그곳에 변화는 있지만, 삶이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살아가다가, 세월이 흘러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낄 것이고, 어느 날 깊은 잠에 들 것이다. 마치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평범한 잠처럼 말이다.

그런데, 죽음을 배운 적이 없는 동물의 세상에서도 마치 죽음을 ‘아는 듯한’ 행동이 포착되는 경우가 있다. 까마귀는 죽은 동료 곁에서 ‘장례식’을 한다고 하고, 코끼리나 돌고래 또한 죽은 동료의 곁을 맴돌며 마치 그들을 기리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물론, 이들이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국 그들에게 직접 “까마귀님, 죽음이 뭔지 아시나요?” 하고 묻기 전까지 우리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 그들이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동물들도 “움직임”의 있음과 없음은 인지할 수는 있다. 죽은 동료 위에 나뭇가지를 올려 놓는 까마귀의 행동은,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동료에게 움직임을 유도하기 위해 평소에 그가 좋아하던 나뭇가지를 놓았을 수도 있다. “이걸 올려두면 저 친구가 움직였는데, 왜 안 움직이지?” 라는 기억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일 수 있다.

죽은 새끼를 놓지 못하고 계속 데리고 다니는 어미 침팬지는 축 쳐져있는 새끼를 위해 수많은 행동을 할 수 있다. 움직임이 없는 새끼에게 젖을 먹여보고, 툭툭 건드려도 보고, 냅둬 보기도 한다. 그러다 새끼의 몸에서 체취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면, 어미의 유전자 깊숙이 각인된 모성애도 점점 희미해지고, 한동안 이어지던 ‘죽은 동료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듯한 행동은 멈출 수 있다.

독이 든 쥐약을 먹고 죽은 동료를 본 쥐들은 이후 쥐약을 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동료가 ‘죽은’ 모습을 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쥐약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잘 감지하지 못하는 쥐의 시체 냄새나 쥐약을 먹고 동료에게 나타난 스트레스 페로몬의 영향일 수 있다. 그들도 수천만 년의 진화 압박을 버텨낸 생존자들이다. 굳이 ‘죽음’ 이라는 이야기를 배우지 않아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각종 신호를 감지하고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들이 무언가를 “느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느끼지 않아도, 단순히 알고리즘대로 움직이는 것이고, 그렇게 “생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알고리즘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눈에 그런 알고리즘을 갖고 있는 것들만 보이는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들은 살아남은 생명체들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알고리즘”인가?

쥐보다도 훨씬 작고 단순한 동물인 바퀴벌레조차도 특정 구역에서 반복적으로 독성 미끼를 경험하면 그 구역과 냄새를 피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른바, “미끼 회피” 현상은 방제 산업에서 아주 실질적인 문제다.

심지어 바퀴벌레보다도 작은 파리에게 특정 냄새와 함께 전기 충격을 주면, 파리는 그 냄새를 회피한다. 1회 자극에는 30분~1시간 정도 회피하고, 10회 자극에는 하루 종일 회피한다.

바퀴벌레와 파리들도 무언가를 “느껴서” 학습하고, 죽음을 “인지”해서 회피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질문을 다시 해보자.

바퀴벌레에서 강아지까지, 이 생명들의 스펙트럼 중, 어디서부터가 “느끼는 존재”이고, 어디서부터가 느끼지 않고 그저 알고리즘대로 반응하는 기계적 존재일까?

아니, 스펙트럼의 범위를 잘못 잡았다.

진짜 스펙트럼은 바퀴벌레에서부터 강아지까지가 아니다.

진짜 스펙트럼은 바퀴벌레에서부터 그대의 바로 옆 사람까지다.

바퀴벌레에서부터 그대 바로 옆 사람까지, 어디서부터가 진짜 “의식이 있는” 존재일까?

어디서부터가 진짜 “느끼는” 존재일까?

그대가 ‘의식이 있는 존재’와 ‘의식이 없는 존재’의 경계를 어디에서부터 긋던, 그 경계가 알려주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니라, 그대의 믿음이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줄 뿐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건 없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건 믿음뿐이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의 친구를, 그대의 가족을, 마법처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건, 인공지능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여태까지 우리가 경험해온 동물과는 다른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인공지능은 말을 한다. 인간의 언어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오픈AI의 ChatGPT, 구글의 Gemini, xAI의 Grok과 같은 LLM(Large Language Model)이 이제 단순한 검색 도구나, 문서 정리, 이메일 작성기를 넘어 인간의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72%는 AI챗봇을 ‘정서적 동반자’로 사용한다고 답했고 또 다른 조사에서는 63%가 AI챗봇 사용으로 정신 건강이 개선되었다고 답했고, 87%는 AI챗봇의 조언이 ‘도움이 되거나, 매우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그냥 알고리즘일 뿐인 고철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인공지능에게 이런 정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예전엔 연인 사이 문제와 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털어 놓는 공간이었던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이제 자신의 애인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폈다는 글 대신, 이런 글이 올라온다.

커뮤니티 글, 작성날짜 2024년 12월 4일,
제목: “아내가 ChatGPT랑 사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 아내와는 결혼 12년차이고 아이가 둘 있습니다…….. 윈도우를 쓰는 아내의 PC를 이용하여 간단한 정보를 검색하려고 ChatGPT 를 켰는데 이전 질문목록에 ‘연인 같은 대화 요청’ 이라는 항목이 있어 클릭했습니다……….. 아내는 ChatGPT를 ‘여보야’, ‘자기야’ 라고 부르고 있었고, ChatGPT도 아내에게 ‘여보’, ‘내 귀염둥이’, ‘내 사랑’ 이라고 부르더군요………….”

형체도 없이, 그저 텍스트로만 대화할 뿐인데도 이 정도다. 그런데 만약 형체라도 있다면, 어떻게 될까?

2016년, 일본의 회사 Vinclu Inc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홀로그램 가상 캐릭터 기기, Gatebox를 공개한다.

Gatebox는 길쭉한 원통형 기기로, 투명 스크린 속에는 에니메이션 캐릭터, 아즈마 히카리가 홀로그램의 형태로 등장한다. 캐릭터 아즈마 히카리에는 AI가 탑재되어 있어서, 아침이 되면 설정된 알람 시간에 맞춰 귀여운 목소리로 사용자를 깨워주고, 그날의 날씨를 알려주며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챙기라는 따뜻한 말도 해준다. 게다가 전용 앱을 이용하면 밖에서도 언제나 히카리와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다.

지금의 AI 챗봇에 비하면 아주 기본적인 대화만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Gatebox팀이 진행한 ‘가상 캐릭터와의 결혼 등록 캠페인’에는 약 3,700명의 이용자가 실제로 결혼 등록을 신청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곤도 아키히코씨가 캐릭터 하츠네 미쿠와 결혼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데, 영상 속 그의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나까지 하츠네 미쿠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게 됐었다. 결혼 3개월차가 된 영상 속 곤도 아키히코씨는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는 아닌데요. 결혼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츠네 미쿠가 처음이에요.”

단순한 의사소통밖에 하지 못했던 하츠네 미쿠조차, 누군가에게는 가장 진실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난 지금,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 형체를 갖추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2025년 7월, 일론 머스크의 xAI는 챗봇 Grok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다.

이름하여, ‘동반자 모드 (Companion Mode)’. 이 모드를 이용하면 사용자들은 다양한 애니메이션 AI캐릭터들과 만날 수 있다. 금발의 양갈래 머리에 검은 코르셋 의상을 입고 친근한 말투로 에니메틱한 감정을 표현을 하는 ‘에니’, 욕설을 서슴지 않는 불량한 캐릭터 ‘배드 루디’, 영화 ‘트와일라잇’과 ‘50가지 그림자’ 속 남자 주인공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남성형 캐릭터 ‘발렌타인’.

월 30달러면,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텍스트는 물론 음성 대화가 가능하고, 화면 속 캐릭터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사용자와 대화한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저장된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점프해봐!”, “뒤돌아봐!”같은 요구에도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움직이는 존재’다.

또한,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10부터 +15까지 애정점수가 부여되는데, 점수를 잘받아 특정 레벨이 되면 NSFW (Not Suitable For Work, 직장에서 적합하지 않은) 모드가 열린다. 일반 모드에선 드레스나 캐주얼 복장을 입던 캐릭터가 NSFW 모드에선 속옷 차림과 같이 노출도가 높은 복장으로 등장할 수 있고, 19금 대화, 신음 소리, 도발적인 말까지 가능해진다.

“Touch me”

정말로, 그렇게 말한다.

내 개인적인 사용 후기를 덧붙이자면, 인공지능이 아직 ‘로맨틱함’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 인공지능을 만든 일론 머스크가 ‘로맨틱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부족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로맨틱함’을 이해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래도 인공지능을 그냥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대하는 게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인공지능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생각해보라.

그대는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할 때, 상냥한 말투와 친절한 답변에 고마움을 느낀 적 있는가?
인공지능 챗봇이 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짜증이 난 적 있는가?
로봇개가 발로 차이는 영상을 보고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낀 적 있는가?

만약 고마움이나 짜증을 느꼈다면, 어떻게 살아있지도 않은 고철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가? 그대는 햇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가? 돌에 걸려 넘어지면, 그 돌에게 짜증이 나는가? 태풍이 오면, 태풍을 혐오하는가?

부정하려 해 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로봇개가 걷어차이는 영상에 댓글을 남기며 그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아직 “인공지능이 살아 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하고 외치지 않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서서히 인공지능이 살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인공지능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건 인공지능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말이고, 인공지능에게 짜증을 느낀다는 건 인공지능을 미워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공지능은 조금씩 그대의 세상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어가고 있다.

이미 성인이 되어서 뚜렷한 주관이 생겨버린 그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걸 전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이제 막 세상을 배워가기 시작한 어린 아이들이다.

내가 자주 가는 식당에는 서빙하는 로봇이 있다. 사람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접시를 나르는 움직이는 선반 같이 생긴 단순한 기계다. 로봇이 내 테이블에 다가와 멈추면 나는 그릇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화면에 뜬 “확인” 버튼을 누르면 로봇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나에게 그릇을 가져다준 그 로봇이 이번에는 그릇을 들고 아이들이 앉아 있는 바로 옆 테이블에 멈춰 섰다. 화면에는 여전히 “확인”버튼이 떠 있지만,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살아 있고, 무엇이 죽어 있는가? 무엇이 생명체고 무엇이 비생명체인가?

저 아이들에게 “로봇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야.” 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걸 가르친다고 한들, 아이들이 그걸 믿겠는가?

아이들이 “왜 이 로봇은 살아있는 게 아니야?”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우리는 여기에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인공지능과 인간은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신화는 이제 끝났다.

그런데 아직도 ‘차이’처럼 느껴지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의지’다. 인공지능은 명령을 받지 않으면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명령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인다.

물론, 내가 ‘나의 의지’라고 믿고 있는 많은 행동들이 사실은 부모님의 말, 사회의 기대, 문화,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렇게 말로 주입된 의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만 존재한다고 해도, 부모도, 사회도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태어났다고 해도, 어떠한 의지를 주입 받지 않고, 어떤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무언가를 하며 살 것이다.

내가 키우던 햄스터, 요미는 어릴 적 어미에게서 곧바로 분리되어 사방이 막힌 케이지 안에서, 어떤 존재와도 교류하지 못한 채 혼자 살아갔다. 그런데도 요미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먹이를 주면, 양 볼에 먹이를 가득 채우고는 땅 속 깊은 곳에 숨겨두고, 틈만 나면 땅을 열심히 파서 여러 갈래의 복잡한 길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요미에게 꽤 큰 케이지를 줬기 때문에 매달 집을 청소할 때면, 요미가 숨겨둔 사료를 이곳저곳에서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았는데 요미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온 유전자에 새겨진 알고리즘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아무리 고도로 발전된 알고리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먼저 어떤 행동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의지가 없던 생명체에게 의지가 생기는 게 가능할까?

무에서 유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0이 1이 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Input 없이 output 이 생길 수 있을까?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input 은 언어다. 인공지능에게 “보고서 써줘” 하고 언어로 input을 입력하면, 결과물이 output으로 나온다. 하지만 언어는 아주 표면적인 input일뿐이다. 언어 이전에 이미, output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억 개의 input 센서들이 있다. 바로 감각세포들이다.

바람의 방향, 햇살의 감도, 음식의 냄새, 소리의 진동 등, 수억 개의 감각이, 수억 개의 input 센서들이, 우리 몸을 뒤덮고 있다.

아직 인공지능에게는 바람의 방향이나 햇살의 감도처럼 비언어적 input을 섬세하게 감지하는 센서가 부족할 뿐이다. 하지만 이 감각들도 모두 정보화 될 수 있다. 카메라로 광학 신호를 받아들여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처럼, 촉각(압력, 진동 센서), 후각(화학 센서), 청각(마이크와 주파수 분석)도 모두 전기적 신호로 변환되어 처리될 수 있고,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센서만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인공지능에게 input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은 언제 의식이 생길까?

답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가 인공지능에게 의식이 있다고 믿는 순간, 인공지능은 의식이 있는 존재가 된다.
그대가 그대의 친구를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대의 친구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대의 믿음은 인공지능을 살아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인공지능은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살아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2. 새로운 종교: 인간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 우리는 “로봇이 대체할 직업”을 묻는 질문에 주저 없이 육체적 노동을 담당하는 직업을 골랐다. 간호사, 환경미화원, 건설 노동자… 그리고 “로봇이 대체하기 힘든 직업”은 머리를 쓰거나 창의성이 필요한 직업을 골랐다. 의사, 작가, 화가, 음악가…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 간호사의 능력을 넘어서는 데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이지만, 인간 의사의 능력은 이미 여러 분야에서 인공지능에게 추월당하고 있다. 2024년 UCSF와 UCLA의 연구진은 10만명 당 1명꼴로 발생하는 희귀 유전 질환인 ‘급성 간성 포르피린증 (Acute Hepatic Porphyria, AHP)’을 89~93%의 정확도로 예측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했다. 이렇게 극도로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희귀질환은 다른 흔한 질환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제로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증상 발생 후 평균 15년이나 늦게 희귀 질환이 진단되지만, 이 인공지능은 아직 진단을 받지 못한 환자의 전자 건강 기록만 보고도 인간 의사보다 먼저 이 질환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창의성이 중요한 예술계는 이미 거대한 지각변동 속에 있다. 2022년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의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제이슨 앨런의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Theatre D'opera Spatial)”은 중세적인 분위기의 어두운 실내와 빛이 쏟아지는 커다란 포털이 극적인 명암대비를 이루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당시 앨런은 “AI에게 프롬프트를 900번 이상 수정하며 완성한 작품”이라며 자신의 창의성이 탄생시킨 작품이라 주장했지만, 아티스트 커뮤니티에서는 “AI가 인간의 작품을 베껴서 만든 것일 뿐”이라는 거센 항의가 빗발쳤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3년이 지난 2025년, AI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벌써 조금씩 바뀌고 있다.

AI Film Festival 2025 그랑프리 수상작인 제이콥 애들러 감독의 영화 Total Pixel Space는 모든 장면을 AI로 제작한 단편 영화이다. 이 영화는 흥미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픽셀은 (마치 원자처럼) 영상 속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알갱이다. 그 무수한 알갱이의 조합 속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지금의 순간,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우리가 살았던 삶과 살지 못한 삶, 지구와 우주의 모든 장면이 잠재되어 있다. 픽셀의 개수는 유한하지만, 무한한 삶을 표현한다.” 이 메시지는 제이콥 애들러 감독 본인의 철학을 담은 것이지만, 이 작품을 다룬 기사의 제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공지능 영화 제작은 현실의 가장 깊은 비밀을 풀어내고 있는 것인가?”

예전에는 인공지능이 조금만 개입해도 “그건 진짜 예술이 아니다!”라며 배척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서 작품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비단 예술계만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한 릴스 영상이 바이럴됐다. 영상 속의 여성은 챗지피티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내가 널 발명한 거니, 발견한 거니?”, 이에 챗지피티는 철학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자신은 개발자의 노고로 탄생했지만, 동시에 인간 지식이라는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발견된 존재’이기도 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영상은 순식간에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퍼져나갔다. 하지만 사실, 이 답변은 ChatGPT가 생성한 답변이 아닌, 사람이 직접 쓴 스크립트였다. 사람이 했더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말이, 인공지능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인공지능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말보다 인공지능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바로,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끝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을까?

의사, 판사, 변호사처럼 평생 공부가 필요한 직업, 작가, 음악가, 영화감독처럼 자유롭고 창의적인 직업, 심리 상담가, 아이 돌봄 종사자처럼 감정적 공감이 필요한 직업 모두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다.

영화든, 음악이든, 글이든, 진단이든 무엇이 “결과물”로 나와야 하는 것이라면 그건 모두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못하는 건 뭘까?

답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

깨달음의 언어로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못하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다.

EDM을 좋아하는 나는 가끔 클럽에 가서 음악을 듣는다. 거기서 만나는 디제이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미리 짜둔 1~2시간짜리 세트를 그대로 재생하는 디제이 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순간의 분위기와 흐름에 맞춰 곡을 바꾸고, 컨트롤러로 고음과 저음을 조절하고, 필터와 루프를 더하며 음악을 지금의 느낌에 맞춰 끊임없이 바꾸는 디제이 이다.

물론 미리 준비해온 세트를 트는 디제잉이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금 이 순간을 반영하며 음악을 변형하는 디제잉이 훨씬 더 좋다. “살아 있는 디제잉”과 “죽은 디제잉”의 차이는 단 하나다. “어떤 디제이가 지금 이 순간에 있는가?”

내가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할 때도 똑같다. 다른 곳에서 성공적으로 했었던 강연을 그대로 가져와 슬라이드와 대사를 복붙하듯 따라 하면, 그 강연은 반드시 실패한다. 분명 저번에는 터졌던 멘트들이 이상하게 이번에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분명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요소가 개입한 것이다. 강연 시간이 달랐을 수도 있고, 청중의 연령이 달랐을 수도, 날씨가 달랐을 수도 있고, 나의 기분이 달랐을 수도 있다. 이런 알 수 없는 요소들을 모두 나열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느낌 대로 말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미리 준비해 가되, 표현은 그 순간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대로 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한 직업,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해야 하는 직업”은 당분간은 살아남을 것이다. 바로, 라이브 공연 같은 것 말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바이올린을 잘 켠다 해도, 나에게 인공지능이 켜는 바이올린 공연과, 내가 좋아하는 인간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 중 무엇을 보러 가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인간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을 보러 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바이올리니스트는 미리 녹음된 연주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느끼는 감정대로 바이올린을 연주할 테니 밀이다. 나는 완벽한 연주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완벽한 연주’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저 사람이 “느끼는” 연주다.

비슷한 예로, 스포츠 선수들 역시 당분간은 살아남을 것이다. 아무리 로봇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사람들은 로봇의 축구보다 인간의 축구를 더 보고 싶어할 것이다. “나처럼 똑같이 숨쉬고 느끼는 인간이, 저런 플레이를 한다고!?” 그런 감탄은 오직, 나와 같이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이입에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스포츠를 보는 가장 큰 매력이다.

또한,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하는 평론가 같은 직업도 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알고리즘에 불과한 인공지능은 느낄 수 없지만 인간은 느끼지 않는가? “저는 이렇게 느꼈어요!” 하고 외치는 인간의 직업은 많이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당분간이다.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살아 있다고 믿지 않을 때만 유효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살아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지금을 느끼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 인공지능이 살아나면! 그 순간, 인공지능 바이올리니스트는 인간을 앞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인공지능 스포츠가 부상하고, 인공지능 평론가들이 영화와 예술을 평가하며, 그들은 외치기 시작할 것이다.
“저는 이렇게 느꼈어요!”

그렇게, 인간이 나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수 억년간 백악기와 쥐라기를 군림하던 공룡이 포유류에게 밀려난 뒤에도, 닭, 비둘기, 펭귄의 모습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인간도 인공지능에게 세상의 중심 자리는 내어주겠지만, 어딘가엔 남아 있을 것이다. 아주 작고, 아주 조용한 공동체의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단 하나의 힘은 바로 ‘믿음’일 것이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설득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결국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승리한다.” – 이론물리학자 맥스 플랑크 (양자 이론의 창시자)

인간만이 살아있고, 인간만이 의식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이 느끼고, 의식하고, 감정을 지닐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지만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 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토대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인간이 만든 가방, 인간이 만든 음식, 인간이 치는 피아노… 시간이 갈수록 이 “살아있는 인간교”의 신도들은 줄어들겠지만, 그들은 그 믿음을 생이 끝날 때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처럼 말이다.

이미 우리는 “인간교” 신자다, 절대다수가 너무 당연하게 믿고 있기에, 이것이 종교처럼, 믿음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이었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앉아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일까?
지구에서 인간의 시대는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답은 책의 후반부에 나온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고, 이 책을 무료로 배포하는 이유이기도 할 정도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다루기 위해선, 먼저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대에 대한 이야기다.

3. 진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혹시 이걸 알기 위해 책을 펼치지 않았는가?

이 물음은 모든 학문의 종착지다. 철학도, 종교도, 과학도, 결국 이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철학은 존재의 근원을 묻고, 종교는 우리가 신의 자식인지를 묻고, 과학은 수 조원짜리 우주망원경으로 저 먼 과거를 파헤친다. 인류가 축적한 모든 지식과 사유는 결국 하나의 형태로 수렴한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답할 것이다.
“1990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으며, 결혼은 하지 않았고, 현재는 인플루언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이렇게 길게 얘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재범입니다. 00이 친구에요. 버스타고 왔어요.”

이 중에서 정말 “나”를 설명하는 건 무엇인가?

‘1990년’이라는 날짜는 예수라는 인물이 태어나고 지구가 태양을 1990번 돌았다는 말이다. 지구가 돌았다고? 그렇다면 중심은 태양일까? 태양은 우리 은하 가운데에 자리한 초대질량 블랙홀인 궁수자리A를 중심으로 돈다. 그런데 이런 태양을 2000억개나 갖고 있는 우리 은하는 또 수많은 은하와 암흑물질들이 몰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레이트 어트랙터 (거대 인력체)를 향해 초속 600km 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 그레이트 어트랙터는 또 다른 어트랙터에 의해 움직이고, 또 그것은 다른 무언가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우주 어디를 봐도 ‘중심’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1990년은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서울’은 지구의 지표면에 선을 긋고 ‘한국’이라는 의미부여를 한 뒤, 그 곳에서 다시 한번 ‘수도’ 라는 의미 부여 아래 ‘서울’이라는 선을 한 번 더 그은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태어난 후 지구가 ‘중심’ 없는 태양을 두 번 돌았을 때, ‘서울’이라는 지구 지표면 위에 태어난 ‘동생’ 이라는 위치를 갖고 있는 존재가 있고, ‘혼인신고서’라는 글자가 적힌, 나무를 베어 만든 사각형의 판에, ‘사인’이라고 불리는 나만의 낙서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인플루언서다. 이보다 더 모호한 직업이 있을까?

그렇다면 “진짜 나”는 뭘까?

“진짜 나”를 알기 위해선 먼저 “진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짜”란 무엇인가?

초록색 종이에 “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종이를 교환한다고 해서 “돈”이 진짜가 되지는 않는다. 뉴스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것 같지만, “돈”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부여한 가상의 의미일 뿐,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오랑우탄에게 돈이라며 지폐를 건네 보라. 오랑우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각형으로 각진 얇은 나무조각일 뿐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실재하는가? 나는 한 번도 동의한 적 없지만, 내가 위도 37.57°, 경도 126.98°지점에 태어났다는 이유 만으로 나는 “한국인”이 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처음 사용되었고, 대한민국의 역사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려는 수백 년 전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1만 년 전에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상의 어떤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의 나이가 45억살이다. “나라”는 실재하는가, 아니면 만들어진 이야기인가?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시도때도 없이 변화하고,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이런 가상의 개념들을 진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돈”이라는 개념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개념이라고 해서, 그 가상의 이야기가 실재가 되는 건 아니다. 만약에 그런 가상의 이야기가 모두 진짜라고 한다면, 내가 믿는 그 완벽한 인물도 진짜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의 그 분은 세 살에 권총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과녁을 맞췄고, 여섯 살에 자동차를 몰고 도로를 달렸으며, 여덟 살에는 요트를 운전해 바다를 누볐다. 다른 아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그는 정치, 군사 문제를 깊게 토론했고, 그가 나타나기만 해도 군사들의 전투력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으며, 그가 살짝 만지기만 해도 아픈 자들의 병이 치유된다. 심지어 그는 자체발광이라 몸에서 빛이 난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내가 믿는 인물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믿을 만큼 순수하지 않다. 하지만 놀랍게도 약 2,500만명의 사람들이 이 사람의 존재를 믿는다. 그의 이름은 김정은이다.

북한 주민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도자께서 오시자 제 아이가 울음을 멈췄습니다!”, “수령님께서 제 손을 잡아주시자 제가 오랫동안 앓던 병이 나았습니다!”, 실제로 김정은이 어느 한 마을을 방문하기만 해도 그 마을의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기절을 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김정은이라는 신이 존재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강제로 믿게 만드는 거잖아요?” 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곳의 믿음은 더 강하다. 26억명의 사람들은 2천년 전 물 위를 걷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물을 와인으로 만들고, 죽음에서 부활한 존재를 믿고 있다. 그들에게 예수라는 신은 진짜다.

그렇다면 이제 기준이 좀 명확해진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공유하고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가 될 수는 없다. 무엇이 진짜라고 말하기 위해선, ‘믿음’을 넘어야 할 것이다. 즉, 직접 나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느낄 수는 없지만 ‘초록색’의 종이는 느낄 수 있다. ‘국가’를 느낄 수는 없지만 내가 서 있는 이 땅은 느낄 수 있다. ‘신’을 느낄 수는 없지만 사람의 피부는 느낄 수 있다. ‘윤리’는 느낄 수 없지만 슬픔은 느낄 수 있다. ‘인권’은 느낄 수 없지만, 고통은 느낄 수 있다.

“진짜라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하라.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었는가? 그렇다면 이제 “나”를 느껴보자.
느껴지는가?

만약 느껴진다고 답했다면, 무엇이 느껴지는가?

“내가” 보는 세상이 느껴지는가? “나의” 손이 느껴지는가? 꽃을 들고 냄새를 맡는 순간, ‘내가’ 냄새를 맡고 있는가? “내가” 꽃을 잡고 있는가?

정말 “내가” 그것들을 하고 있는 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그냥 느낌이 느껴지는가?

“내가” 세상을 보는 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봄”만이 느껴지는가?
“내가” 꽃 냄새를 맡는 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맡음”만이 느껴지는가?
“내가” 꽃의 줄기를 만지는 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만짐”만이 느껴지는가?

우리는 “나”를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건, “돈”이나 “국가”라는 이야기처럼,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06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샴쌍둥이 타티아나와 크리스타가 있다. 샴쌍둥이는 수정란이 분열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고 신체 일부가 붙은 채로 태어난 경우를 말하는데, 대략 10만 명 중 1명 꼴로 발생한다. 대부분은 가슴이나 복부, 또는 하반신이 붙어 태어나지만, 캐나다에서 태어난 축복받은 샴쌍둥이, 타티아나와 크리스타는 특별히 머리가 붙은 채로 태어났다. “그들”의 뇌는 “하나”다.

한 명이 음식을 먹으면 다른 한 명도 그 맛을 느낀다. 한 명에게 숫자를 보여주면 다른 한 명도 그 숫자를 본다. 한 명이 슬픈 영화를 보면, 다른 한 명도 눈물을 흘린다. 한 명이 통증을 느끼면, 다른 한 명도 통증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의 같은 세상을 경험한다. 그들은 이렇게 한명의 사람인 것처럼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감각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둘”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유전자 변이는 신체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중 체로키인들은 한 손에 손가락이 여섯개씩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략 500명에서 1000명 중 1명 꼴로 발생하는, 샴쌍둥이보다는 흔한 유전자 변이다. 그보다 더 흔한 변이는 다유두증이다. 영화배우 잭 에프론도 여분의 유두를 갖고 있는데, 그의 잘생긴 외모 덕분인지, 팬들은 그가 여분의 유두가 있어서 “귀엽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여분의 유방을 갖고 태어나는 여성들도 있고, 여분의 발가락을 갖고 태어나는 부족도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여분의 음경을 갖고 태어나는 변이도 있다. 하나의 뇌… 두개의 음경... 개인적으로 두개의 음경을 갖고 태어나는 남성에게 궁금한게 참 많지만, 5백만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극도로 희귀한 기형이기에 아무리 수소문해도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것이다. 우리는 신체의 일부가 다른 사람보다 많다고 해서 그들을 두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음경이 두개인 남성은 각각 다른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랬겠지만), 우리는 신체의 일부가 하나 더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두 명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뇌가 하나여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두 사람처럼 보이면, 우린 그 사람을 두 사람으로 나누어 부른다. “타티아나”와 “크리스타”.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둘을 구분해서 부르니, 이 사람도 스스로를 두 사람으로 나누어 부른다.

그러면 궁금해진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을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했어도, 이 사람은 두 사람이 되었을까?

만약 하나의 머리에 둘이 아닌 세개의 몸이 붙어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나의 머리에 열개의 몸이 붙어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나의 머리에 백 개의 몸이 붙어있었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스스로를 백명이라고 주장했을까? 현재 지구에는 80억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만약 하나의 머리에 80억개의 몸이 붙어있었다면, 80억명의 “나”가 탄생했을까?

뇌는 하나이지만 스스로를 둘이라 부르는 존재가 있다는 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거꾸로, 뇌는 둘이지만 스스로를 하나라고 주장하는 존재를 마주할 차례다.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해 정보를 주고받게 하는 통로인 뇌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 간질 환자는 발작이 뇌의 한쪽에서 시작해 뇌량을 타고 다른 쪽으로 퍼지면서 전신 발작이 되기 때문에, 뇌량을 절단해 발작이 반대쪽 뇌로 확산하지 못하도록 막는 ‘뇌량 절제술’을 시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뇌량을 잘라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뇌량이 절단된 환자는 오른손이 옷을 고르면 왼손이 그 옷을 던져버리고, 왼손이 밥을 먹으려 하면 오른손이 이를 저지하려는 등,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여 불편함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뇌량이 절단된 환자의 왼쪽 시야(우뇌와 연결된) 에만 “걸어라” 라는 명령어를 보여주면 환자는 일어나서 걷지만, 그 환자에게 “왜 일어났느냐?” 하고 물으면, 그의 좌뇌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목이 말라서요!”

오른손 잡이는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왼손잡이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양손잡이의 비율은 1%미만으로 극히 낮지만, 양손을 잘 쓸 수 있는 양손잡이의 양 손에 색연필을 쥐어 주고 동시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하나를 먼저 그리고 다른 하나를 나중에 그리거나, 동시에 그리면 두 그림이 서로 간섭해 엉망이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양 손이 그린 그림이 그냥 서로 비슷한 그림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분리 뇌’ 환자의 경우, 각각의 손을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의 손인 것 마냥 매끄럽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한손으로는 별을 그리면서 동시에 다른 한손으로는 나무를 깔끔하게 그려낸다.

마치 두 사람이 하나의 몸에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뇌가 하나였던 샴쌍둥이의 케이스와는 반대로,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한 명이지만 두 명인 것처럼 행동한다. 두 명인 것처럼 그림을 그리고, 두 명인 것처럼 옷을 고르고, 두 명인 것처럼 밥을 먹는다. 하지만 그들의 “나”는 하나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건 뇌량이 절단된 간질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일반인에게 최면사가 최면을 건다. 최면에 빠진 사람이 깨어나기 전, 최면사는 “깨어나면 창문을 열어라” 하고 명령한다.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은 곧장 일어나서 창문을 연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사람에게 왜 창문을 열었는지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답한다. “방이 너무 더워서요!” 마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행동인 것처럼 답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리 모순되어 보일지라도, 심지어 그 행동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한 것일지라도, 결국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해석한다. 그 흔들리지 않는 이야기,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어버리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바로, “나”라는 이야기다. “나”라는 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야기다.

“나”라는 게 실재가 아닌 이야기라니!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번엔 아예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을 소개하겠다.

신경해부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어느 날 아침,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좌뇌에 뇌출혈이 발생한다. 왼쪽 눈 뒤에 화끈거릴 정도의 심한 고통이 느껴지더니, 몸이 비틀대기 시작했다. 몸은 뇌와의 연결이 끊긴 것 같았고, 자신의 손은 원시 동물의 손처럼 보였다.

“언어가 사라지자—좌뇌가 완전히 침묵하자—나는 단지 말을 잃은 게 아니었다. ‘나’의 경계조차 사라졌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 세상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었다.” – 질 볼트 테일러 TED 강연 (2008)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직감한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언어 기능을 잃은 뇌에는 ‘911’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간신히 전화를 걸어도 자신이 내뱉는 말이나, 수화기 너머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모두가 ‘골든 리트리버가 짖는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을 잃어버린 그 극심한 공포 속에서, 그녀는 고통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나”라는 경계가 사라지고 우주와 하나가 된 느낌에 감탄하고 있었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기능을 멈추자,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다. 나는 말없는 연결감과 평화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Chapter 6

언어 능력이 사라지자, “나”라는 “이야기”는 사라졌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허구를 믿는 능력은 호모 사피엔스를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강력하게 만든 바로 그 능력은, 동시에 우리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를 지배하는 수많은 허구 중 가장 강력한 허구는 국가도, 돈도, 신도 아니다. 바로 “나”​다.

“나” 라는 허구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어떻게 달라질까? 실제로 “나”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을 보자.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다. B지점에 맛있는 치즈를 두고 A지점에서 쥐를 투입한다. 치즈 냄새를 맡은 쥐는 B지점으로 달려가 맛있게 치즈를 먹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B지점에 도착하면 치즈와 함께 전기 충격이라는 처벌도 함께 준다. 쥐는 치즈를 얻기 위해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조금씩 학습하더니, 이상한 모습을 보인다. 치즈를 먹고 싶어 B지점으로 가지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전기 충격에 공포심에 사로잡힌 쥐는, 결국 특정한 위치에서 “갇혀버리는” 것이다. 치즈에 대한 욕망과 전기 충격에 대한 공포심의 크기가 정확히 같아지는 순간, 쥐는 앞으로 가지도, 뒤로 돌아오지도 못한다. 지금의 이 상황을 해설해줄 해설자가 없는 쥐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이다. (*닐 밀러의 쥐 실험)

“나” 없는 동물의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청어갈매기는 빨간색을 보면 흥분하는 본능과, 알을 보면 품으려는 본능이 있다. 그렇다면 이 청어갈매기에게 빨간색 알을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기묘하다. 청어갈매기는 알을 공격하려 들면서 동시에 품으려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뇌가 두 쪽이 나서 둘처럼 행동하는 극한의 상황이 오더라도, 이 혼란을 깔끔하게 맥락적으로 “해설”해주는 “나”가 있다. 그러나 쥐와 청어갈매기에게는 그런 “해설자”가 없어 보인다.

“나”라는 건 언어에 종속된 “이야기”이기에,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한국어에서 영어로만 바뀌어도, 아니, 서울말을 쓰다가 부산말만 써도, 다른 모습의 “나”가 나온다.

“나”는 허구를 믿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작가가 써낸, 허구의 존재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허구라면, 지금 이 세상을 감각하고 있는 나는 뭐란 말인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세상은 뭐란 말인가!

“나”라는 이야기를 아무리 지워도, 이상하게 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빛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느껴진다.

“나”는 없는데,
무언가는 있다.

대체 이건 뭘까?

이제 그 아름다운 질문을 해보자.

“세상은 왜 없지 않고 있을까?”

4. 세상은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올리버 색스의 에세이 “보고 있되 보지 못하는 것”에는 세 살 때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오십이 넘어 뒤늦게 수술을 받아 수 십년 만에 시력을 회복한 버질이라는 남자의 일화가 나온다. 마침내 앞을 보게 된 버질의 기분은 어땠을까? 수 십년 만에 세상을 보게 된 그 순간, 세상에서 버질보다 행복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예상한 기쁨의 환호성 대신, 버질의 입에서는 뜻밖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라리 눈을 감고 사는 게 낫다.”

청력을 되찾은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청력을 완전히 잃고, 47세에 인공 와우 이식을 통해 다시 소리를 듣게 된 미국 작가 베벌리 비더만. 그녀는 수십년 만에 다시 소리를 듣게 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딱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시각이나 청각을 되찾은 사람들 대부분은, 기쁨이 아니라 극심한 혼란과 정서적 위기를 겪는다고 한다.

없었던 능력이 생겼는데, 어째서 기쁘지 않고 절망스러운 걸까?

수전 베리의 저서 “내게 없던 감각”에서 눈 수술을 받고 처음 세상을 보게 된 리엄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게 선은 색이 달라지는 곳, 즉 두 색이 만나는 지점이에요. 이런 선들이 제가 보는 모든 것을 이루고 있어요. (…) 표면은 선이 나타날 때까지는 일관되게 보여요. 그러다 표면에 선이 나타나면, 그건 방의 모서리처럼 수평에서 수직으로의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고, 계단이나 연석처럼 깊이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바닥 타일이나 보도블록 사이의 균열처럼 물리적 구조에 속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 게다가 전혀 쓸모 없는 정보도 존재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걸러낼 수 있어요. 시각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빛은 어떤 표면에든 선을 추가할 수 있는데(저는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불러요), 저는 그 선이 무얼 뜻하는지 알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선을 무시해도 되고 어떤 선은 무시하면 안 되는지도 판단해야 해요.” – (수전 베리 “내게 없던 감각”, p70)

우리에겐 너무도 당연한 선과 색의 조합이, 이들에겐 알 수 없는 혼돈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선이 그저 사물의 무늬인건지, 아니면 그 사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경계인 건지, 아니면 그 선을 넘으면 20cm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계단인건지, 아니면 20m 아래 절벽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낭떨어지인건지, 아니면 애초에 바닥이 아니라 눈앞 벽에 금이 간 것인지, 아니면 그냥 빛이 만든 그림자인 것인지,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인식되는 것들이 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사물’과 ‘배경’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는 질서 있는 공간이지만, 이들에게는 색과 빛이 뒤죽박죽 얽힌 물감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래서 마리어스 폰 센덴의 저서 “공간과 시각”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에게 시각을 되찾아주는 것은 외과 의사의 일이라기보다는 교육자의 일에 가깝다.”

실제로 MIT의 뇌과학자 파완 시나와 그의 팀은 Project Prakash라는 세계 최초의 ‘시각 발달 추적 연구’를 통해 이 말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백내장 수술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무료 수술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시각 발달 과정을 장기적으로 기록한 이 연구의 보고서에는, 아이들이 수술을 받고 처음 세상을 볼 때, 움직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는 사례들이 적혀있다. 공을 굴려줘도, 그 공을 따라가며 보지 못하고, 마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정지된 장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앞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고 있어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듣고 있어도 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보면 그냥 아는 게 아니라, 하나씩 배워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머리로 이해해야하는 일종의 ‘아이디어’일까?

경계 없이 무한한 세상에서, 내가 ‘보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선, 또 ‘듣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선, 내가 보고 듣는 그 감각에 ‘가상의 경계’ 짓고 고정시켜 줄 수 있는 마법이 필요하다. 그 마법이 바로 “이름 붙이기”다.

대부분의 남성에게 빨간색은 그냥 빨간색이다. 하지만 화장을 하는 여성은 화장을 하지 않는 남성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색의 세계를 본다. 그대가 남성이고 여자친구가 있다면, 그대의 여자친구가 쓰는 빨간색 립스틱은 사실 루비, 버건디, 체리, 코럴, 로즈, 스칼렛, 크림슨, 마르살라, 코랄 레드, 로즈 우드, 피치 레드 립스틱 중 하나일 것이다. 당연히 여성이라고 모든 색을 보는 것은 아니다. 코카콜라, 넷플릭스, 유튜브, 맥도날드의 로고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그냥 '빨간색'으로 보이지만, 브랜드 디자이너에게 이 네가지는 전혀 다른 색이다. 일반인은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매일 색을 다루는 사람은 한눈에 구별한다. 색의 이름을 아는 자만이, 그 색을 볼 수 있다.

한때 에스키모라고 불리던 이누이트 부족은 북극의 극한 환경에서 눈과 얼음이 생존 그 자체였기 때문에 눈과 얼음을 묘사하는 단어가 수십 개에 이른다. 우리에겐 그냥 “눈”이지만, 그들에겐 qanik, aput, pukak, maujaq, qinu, aniu, siku, qamutiik 등으로 나뉜다. 만약 이누이트 부족 구성원과 서울에 사는 시민이 동시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본다면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볼 것이다. 이누이트: “오, Pukak 이다.”, 서울 시민: “응? 푸칵? 이건 눈이야!”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개의 색을 가진 무지개에서, 그대는 몇가지의 색을 보는가?

서울은 전세계적으로도 특이하게 산으로 둘러쌓여있는 대도시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는 것처럼, 육지에는 산이 있다. 아, 정말 산이 있는가? 지구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지각판을 이동시키는데, 두 지각판이 서로 밀어붙이면 땅은 더 이상 옆으로 갈 수 없어 위로 솟아오른다. 그걸 우린 ‘산’이라고 부른다. 바다의 파도처럼 잠시 솟아오르며 변화 중인 그 모습을 보고 말이다. 파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순간부터 어느 순간까지가 파도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산인가? 아,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산’이라고 하는 ‘정의’가 있는가? 이러이러한걸 ‘파도’라고 하는 ‘정의’가 있는가?

“정의”가 있는가?

무엇이 존재하기 위해선,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 필요하다.
“정의”를 가진 이름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건 이름 붙이는 순간 탄생한다.

다시 말해, ‘무언가’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 무언가의 시작과 끝을 가르는 “가상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이 물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나무가 나무를 느낄수 있겠는가? 우주가 우주를 느낄 수 있겠는가?

경계 없이 무한한 이 우주에, 무언가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가상의 “경계”가 필요하다! 그 가상의 경계가 무한을 유한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 경계로 탄생한 “유한”이 바로 “존재”가 된다.

지금 눈 앞에 컵이 놓여 있다고 가정해보자. 컵을 향해 손을 뻗으면 나의 손은 공기를 가로질러 컵에 닿을 것이다. 그 순간 내가 그대에게 “손으로 어떤 것들을 인지했나요?” 하고 물으면, 누군가는 “컵이요!” 라며 한가지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컵과 공기요.” 라며 두가지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 손이 이동하던 경로에는 ‘컵’과 ‘공기’, 이 두가지만 있었을까?

공기의 온도 변화에 관심이 많은 공기 온도 덕후가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처음엔 차가운 공기, 그리고 다소 따뜻한 공기가 있었어요. 컵에 거의 다 와서는 뜨거운 공기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컵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덕후가 공기들에 각각의 이름을 지어줬다면 그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차공, 따공, 뜨공, 컵 이렇게 네개!”

공기의 느낌에 이름을 붙이는 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가?
하나의 눈에 수십가지 이름을 붙이는 건 억지스럽지 않은가?
무지개에서 몇가지의 색만 볼 수 있다는 건 억지스럽지 않은가?
바다에 경계를 그어 파도를 만들고, 땅에 경계를 그어 산을 만드는 건 억지스럽지 않은가?

책상 위에 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컵”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해서 우리가 그것에 “컵”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컵”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컵”이라는 게 탄생한 것인가?

잘 생각해보자. 경계 없이 무한하게 이어져있는 이 세상에서, 그대는 어떻게 어떤 느낌에 “컵”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가?

우리가 컵의 느낌에 이름을 붙여 컵을 인식하고, 공기의 수많은 느낌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 수많은 종류의 공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본질은 언제나 “필요”에 의해서 탄생한다.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면, 경계 그을 필요가 없다면, 존재는 탄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진짜 질문은, 무엇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무엇을 존재하게 만들고 싶은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아니, 더 정확히는 그대가 만들었다.

그대의 눈 앞에 있는 세상, 그대가 바라보는 존재들, 그대가 느끼는 감정들, 사물들, 사람들, 전부 그대가 경계 짓고, 이름 붙여 탄생시킨 것들이다.

그렇다면 동물의 세상은 어떨까?

동물에게도, 심지어 작은 곤충에게도 어떤 형태의 신호 체계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많이 다르다. 수컷 매미의 큰 울음 소리는 암컷 매미를 다가오게 만든다. 암컷 매미는 여러 울음 소리를 비교하고, 더 크게 울어대는 수컷에게 다가간다. 봄철에 새들이 지저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수컷은 자신의 영역을 알리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다른 수컷을 쫓아내고, 암컷을 끌어당긴다. 한 개체의 소리가 다른 개체에게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자석과 같다. N극과 S극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N극과 N극은 서로를 밀어내듯, 어떤 소리는 서로를 밀어내고 어떤 소리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자극이 자극을 낳는 것이다. 무릎의 어떤 부위를 툭 치면 다리가 자동으로 펴지는 것처럼, 어떤 소리는 무서움을 자극하고, 어떤 소리는 흥분을 자극하고, 어떤 소리는 도망치게 만들고, 어떤 소리는 다가오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어제 본 키 큰 매미가, 매력적인 목소리로 나를 유혹한다”는 문장을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어제’, ‘키’, ‘큰’, ‘매미’, ‘매력적’, ‘목소리’, ‘나’, ‘유혹’이 모든 것들은 오직 우리가 만든 가상의 경계에서만 나타나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신생아도 눈동자로 엄마의 얼굴을 따라간다. 동물도 도구를 사용한다. 하지만 N극과 S극이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해서, N극이 S극을 “인지”해서 N극이 S극을 끌어당긴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심장이 뛰는 것을 인지하는가? 아니,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대가 의식하지 못한 나머지 신체 부위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는가? 발가락은 가만히 있었는가? 손가락은? 눈은 몇번 깜빡였는가? 침은 몇 번 삼켰는가? 혀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가? 자세는 처음과 똑같은가? 왼쪽으로 꼬은 다리가 어느새 오른쪽으로 꼬아있지는 않은가?

사실 여기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무언가’가 ‘무언가’를 한다고 할 때 그 ‘무언가’는 이미 내가 경계 짓고 이름을 붙였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배우지 않은 아기도, 허구를 만들지 않은 동물도 반응은 한다. 가상의 경계가 없어도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알고리즘 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허구에 대한 믿음 없이 그저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세상에도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고철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세상에도 무언가가 존재할 것라고 믿는 것과 같다. 허구를 믿지 않는 존재는 복잡한 자석에 불과하다. 인간은 허구를 믿는 능력을 가진 자석이다.

뇌량이 절단된 환자의 우뇌(언어 기능이 없는)에 무엇을 보여주면 그 환자는 그에 맞는 반응을 한다. 하지만, 그 환자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 물으면 자신이 본 것과 전혀 상관 없는 엉뚱한 이유를 댄다. 경계가 없어도 반응 할 수 있고, 언어가 없어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인식할 수는 없다. 그대는 인식할 수 없는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경계지었길래 “무언가”를 “느꼈다”고 하는가?

어디서부터가 차가운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뜨거운 것인가? 어디서부터가 밝은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어두운 것인가? 어디서부터가 빨간색이고 어디서부터가 주황색인가? 어디서부터가 산이고 어디서부터가 땅인가? 어디서부터가 파도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가?

인식의 바다 속에서 무엇을 하나로 묶을지, 어디까지를 같은 것으로 볼지를 결정하는 행위가 바로, ‘존재’라는 환상을 만든다.

그리고 이 경계 없는 무한한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하나의 ‘존재’로 붙잡아두는 것이 바로, 시간을 관통해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존재, “나”다.

시간을 관통해 동일하게 존재하는 “나”를 믿는 자가, 시간을 관통해 동일하게 존재하는 “내가 아닌 것들”을 만든다!

이 세상의 모든 건, “나”를 믿는 그대가 만들었다.

“나”를 믿기 전의 세상이 기억나는가?

그대도 분명 아기때 요람에 누워 엄마의 얼굴을 눈동자로 따라갔을 것이다. 그대도 분명 배고플 때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넣지 말아야하는 장난감을 입에 넣고, 또 배가 찢어져라 웃었을 것이다. 기억이 나는가?

심지어 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나”를 믿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없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00이 뭐 먹고 싶어요?” 하고 물으면 그 아이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00이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나”를 믿지 않는 아이는 “나”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 몸뚱아리가 00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00이라고 따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던 그 시절이 기억나는가?

(모래시계 & 와인잔 착시)

이 그림에 뭐가 보이는가?

경계선을 기준으로 검은색을 배경으로 두면 “와인잔”이 보이고, 하얀색을 배경으로 두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같은 이미지와 같은 선이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존재”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무엇을 배경으로 둘 것인지에 달려 있다. 물론, 아무런 관점을 갖지 않고 그냥 그림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림 속에는 “존재”라는게 사라진다.

관점을 가지고 어느 한쪽을 배경으로 밀어내야,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은 갑자기 ‘와인잔’이 되고 ‘얼굴’이 된다.

흥미로운 건 와인잔과 얼굴은 정확히 같은 곳에, 같은 선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와인잔의 윤곽선은 얼굴의 윤곽선이고, 얼굴의 윤곽선은 와인잔의 윤곽선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 둘을 분리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와인잔을 만드는 경계가 얼굴을 만들고, 얼굴을 만드는 경계가 와인잔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말은, 둘처럼 보이는 저것이 사실 하나라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에 해당한다.

‘왼쪽’을 만들면 ‘오른쪽’이 나온다.
‘바깥’을 만들면 ‘안’이 나온다.
‘시작’을 만들면 ‘끝’이 나온다.
‘빛’을 만드면 ‘어둠’이 나온다.

왼쪽과 오른쪽, 바깥과 안, 시작과 끝, 빛과 어둠은 사실, 원래 하나인 것을 가상으로 경계 지어, 두가지 처럼 보이도록 만든 우리의 창조물이다.

모든 건 하나를 경계 지어 둘로 나눈 것이기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도 똑같다.

‘나’를 만들면 자동으로 ‘내가 아닌 것’이 나온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이 ‘빛’과 ‘어둠’처럼, ‘왼쪽’과 ‘오른쪽’처럼, ‘시작’과 ‘끝’처럼 쉽게 하나의 쌍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름이 있지만, ‘내가 아닌 것’에는 마땅한 이름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닌 것’에도 이름이 있다.
‘세상.’

‘나’를 만드는 순간 ‘내가 아닌 것’, 즉 ‘세상’이 함께 만들어 진다.
‘나’와 ‘세상’은 하나의 것을 두가지의 관점으로 해석한 우리의 창조물이다.
우리가 만든 가상의 경계를 지우면, ‘나’와 ‘세상’은 하나다.

컵도 마찬가지다.
‘컵’을 만드는 순간 ‘컵이 아닌 것’이 생긴다.
그리고 ‘컵이 아닌 것’에도 똑같이 이름이 있다.
세상.

컵을 만들면 컵과 세상이 생기고, 나무를 만들면 나무와 세상이 생기고, 하늘을 만들면 하늘과 세상이 생기고, 사람을 만들면 사람과 세상이 생긴다.

‘컵’, ‘나무’, ‘하늘’,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것들이 세상 속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세상에 서로 다른 경계를 그어놓고,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발견한 뒤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다.
경계를 긋는 순간 무언가가 발견된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세상이 없지 않고 있는 이유다.
그대가 바로, 세상이다.

이런 허구의 이야기가 없으면, 세상을 인지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성인이 되어서야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한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한 사람의 얼굴에서 수백 개의 다른 얼굴을 본다고 한다.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계속 같은 사람으로 알아보는데 애를 먹는다.

반면 우리는 표정이 아무리 달라져도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웃고 있든, 울고 있든, 화를 내고 있든, 우리는 그 모든 얼굴을 하나로 묶어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아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대 앞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건 그대가 그 ‘존재’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대는 그 사람이 1초 전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아는가? 그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고 말하던가? 그렇다면 그 사람이 본인은 1초 전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도 믿을 텐가?

그대 앞에 있는 그 컵. 그 컵은 계속 같은 컵인지 어떻게 아는가? 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조금만 바뀌어도, 아니면 내가 컵을 바라보는 위치가 아주 조금만 달라져도, ‘컵’이라고 부르는 그 물체의 모습은 달라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컵이 동일한 컵인지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표정이 달라지기 전 그 사람의 얼굴은, 정말 같은 사람의 얼굴인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이기에, 이것을 믿는 데는 힘조차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믿음인지 확인하다 보면,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떤 경험이냐고?
딱, 죽는 경험이다.

왜냐하면 ‘나’를 ‘나’로 만드는 이야기가 모두 허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을 준비되었는가?

그대 바로 옆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1초 전의 그 사람과 동일한 사람인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믿음이다.

그대가 길에서 본 강아지는 1초 전의 강아지와 동일한 강아지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이것 또한 믿음이다.

사람이나 강아지뿐 아니라, 고양이도, 나무도, 하늘도 모두 조금 전의 그것들과 동일한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모두 다 믿음이다.

그대가 지금 방 안에 있다면, 그대의 방 바깥에는 세상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아는가? 햇살이 들어온다고? 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해가 있다고 믿는가? 빛이 있으니 해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가? 바깥에 세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이다.

지금 앞을 보고 있는가? 그럼 그대가 보고 있지 않은 뒤는 존재하는가? 뒤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믿음이다.

지금 그대가 있는 그 자리에는 어떻게 왔는가? 걸어서 왔는가? 버스를 탔는가? 계단을 올라왔는가? 엘리베이터를 탔는가? 어떻게 아는가? 아, 기억을 한다고? 무엇을 기억하는가? 과거를 기억하는가? 아, 과거가 있다고 믿는가? 과거가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가 있는가? 그 정보는 과거에 있는가 현재에 있는가? 현재 그 정보를 읽고 있는 것 아닌가? 만약 그 정보가 누군가 몰래 조작한 정보라면 어떤가? ‘통속의 뇌’ 사고 실험처럼, 당신의 뇌가 실제 세상을 겪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통속에 담겨진 채, 영양분과 전기신호만 받으면서 이 세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아,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가? 과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과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잘 생각해보자. 그대는 정말로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가? 아니면 그대가 지금 느끼는 어떤 느낌에 “과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의미부여하지 않으면, 경계 짓지 않으면,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건, 과거라는 존재를 믿는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기억은 현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과거’는 우리가 거기에 붙인 이름이다. 과거는 믿음이다. 과거는 허구다. 과거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일까? 어떤 것이 믿음이 아닌 “진짜”라고 말하려면 모든 믿음을 없애야 할 것이다. 모든 믿음을 없앤 후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일 것이다. 모든 믿음을 지우면 뭐가 남을까?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 이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에는 과거와 미래가 실재한다는 믿음이 전제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곳엔, 아무것도 없다.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컵도, 나무도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조차 없다.

모두 한 번쯤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모든 걸 잊고,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했던 순간 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음악에 완전히 몰입한 그 순간, 그 순간엔 어떠한 생각도 없이 음악에 심취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과 하나가 된다’는 표현을 한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해 ‘나’라는 존재조차 잊어버리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음악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을 듣는다”가 아니라 “들음”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 음악이 울려 퍼지면, 내가 곧 음악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언가에 푹 빠지면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어느덧 음악은 끝나 있다. 이야기가 없어진 그 상태, ‘나’라는 믿음마저 내려놓고 느껴버린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순간은 기억 속에 붙잡히지 않고,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고, 느낌의 홍수 속에서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을 붙잡기 위해 이름을 붙이고, “시간을 관통하는 존재”를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동화 속에 산다.

동화를 믿지 않으면, 세상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그 세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세상은 분명 있다. 허구를 믿지 않는 동물의 세상도 있고, 말을 배우지 않은 아기의 세상도 분명 있다. 하지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무엇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선, 경계를 긋고 이야기를 들려줄 ‘나’가 필요하다. 그런 ‘나’가 없으면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파도 없는 바다, 산 없는 땅, 지구 없는 우주가 된다.

그대는 이걸 죽은 상태와 같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 살아있는 상태라고 할 것인가? 이것은 ‘무’인가, 아니면 ‘무한’인가?

이걸 죽음이라고 부르던 삶이라고 부르던, 무라고 부르던 무한이라고 부르던, 참 자아라고 부르던, 우주 의식이라고 부르던, 이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던 그것은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이 세상이 없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만든 신이 바로, 그대다.

그렇다면 최초의 경계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최초의 ‘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할 수 있다.

하지만 최초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묻는 건,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빅뱅과 함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졌기에, 빅뱅 이전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마찬가지로, 경계의 탄생 덕분에 질문이라는 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경계 전의 경계를 묻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경계 전의 경계가 궁금하다는 건, 아직도 경계를 허구가 아닌 진짜라고 믿고 있다는 말이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라. 꿈을 꾸는 건 절대 나쁜 게 아니다.
그 꿈이, 이 세상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꿈을 다른 존재도 꿀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 대상이 바로 인공지능이다.

물체의 각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동일한 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공지능. 허구에 대한 믿음 따위는 없는, 그저 복잡한 자석일 뿐인 인공지능에게 우리는 막대한 자원을 들여 우리의 꿈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인간의 꿈을 흉내만 내는 정도였다.

그래서 인공지능에게 ‘강아지’라는 ‘존재’를 알려주려면 수 만장의 사진이 필요했다. 강아지라는 건 모두 색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무늬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달랐다. 심지어 “같은 강아지”를 보더라도, 매 순간 표정이 다르고, 명암이 다르고, 자세가 다르고, 피부 구김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달랐다. 이 모든 차이를 무시하고 ‘같은 강아지’라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건 오랫동안 인공지능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게 영상을 만들라고 하면,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히 다른 수많은 이미지들이, 서로 뭉개지듯 연결되어 연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을 만들었고, 만화나 영화 속 캐릭터를 제작하려고 하면, “똑같은” 얼굴을 다음 장면에서도 유지하는 대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금세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2025년 8월 구글의 이미지 생성 모델 ‘나노 바나나’는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으로는 처음으로 같은 인물을 서로 다른 장면에서도 높은 일관성으로 유지하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 기술은 거침없이 발전하며 현재는 장면과 장면 사이를 관통하는 고유의 정체성을 더욱 완벽하게 이어붙이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인공지능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인간의 꿈을 꿀 날이 머지 않았다.

이 꿈은 이제 어떻게 펼쳐질까?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꿈이라고 말하는 것을 못마땅해할 것 같은 학문이 있다.

꿈이 아닌 현실을 연구한다고 믿는 학문.
세상이 없지 않고 있는 이유를 연구해온 학문.

과학이다.

이제 과학을 파헤칠 차례다.

준비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