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은 것.
AI는 지금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두다. 등장한 지 불과 몇 년만에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공지능 챗봇들, 인공지능 작곡가, 인공지능 화가, 인공지능 비서, 인공지능 의사, 인공지능 박사… 인간이 하는 것 중 인공지능이 못할 것은 없어 보인다.
이처럼 급격한 변화에 많은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이 막강한 인공지능을 어떻게 다루고 통제할 것인지, 지금 당장 의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모두가 크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우려 섞인 걱정들은 모두, 앞으로 5년에서 길어야 20년까지의 변화에 대한 일이다. 곧 닥쳐올 진짜 문제는 인공지능에게 달려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달려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뭘까?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가 뭘까?
인간과 동물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힘센 사자, 호랑이, 곰은 모두 철창 안에 갇혀 불쌍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 연약한 우리 아이들은, 태평하게 철창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답은 딱 하나다.
‘말’.
인간은 말을 할 수 있다.
철창 안에 갇힌 곰이 “살려주세요. 저 여기 있기 싫어요.” 라는 말 한마디만 할 수 있었어도, 그들은 아마 지금 그 철창 안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도서 “사피엔스” 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인류 종과 동물을 제치고 지구의 주인이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
호랑이처럼 강하지도, 다람쥐처럼 빠르지도 않은 인간은 생존을 위해 ‘무리’를 만들어 협력을 통해 살아남았다.
거대한 초식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어야 했던 늑대에서부터, 공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V자 편대 비행을 위해 무리를 이루어야 했던 철새들까지, 많은 동물은 무리를 지어 생존한다. 적게는 서너 마리에서 많게는 수십 마리, 정말 드물게는 백 마리가 넘는 대규모 집단도 존재한다. 2023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침팬지 제국 (Chimp Empire)>에서는 평균 50마리 규모인 침팬지 집단보다 훨씬 큰, 120여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대규모 침팬지 무리를 조명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000만 마리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동물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종은 인간밖에 없다.
인간에게도 뇌의 크기에 기반한 ‘집단 크기’의 한계는 있다. 이를 ‘던바의 수’ 라고 하는데, 뇌의 인지 능력, 특히 신피질의 크기에 기반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 집단의 크기로, 인간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 인원수가 약 150명 정도라고 설명한다. 150명까지는 서로가 얼굴을 기억하고 공동체 일원으로 인지하면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 생물학적 한계를 훌쩍 뛰어 넘게 해주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걸 믿는 힘’ 이다. 이 힘만 있으면, 너와 나, 저 사람과 이 사람, 길가다가 마주친 낯선 사람과도 협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교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아래 하나가 되고, 군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국가’ 아래 하나가 되며, 세계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돈’이라는 개념 아래 하나가 된다.
“저를 처음 보세요? 자 여기 돈이 있습니다. 우리 이제 거래를 해볼까요?”
초록색 종이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가치를 부여한 “돈”은 전 세계를 연결하는 거대한 집단적 환상이다.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 인공지능도 말을 한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르던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차이가 없다니,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인간은 감정이 있잖아요.”, “인간은 의식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묻겠다.
그대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감정이 있는 것 같은가? 의식이 있는 것 같은가? 생각이 있는 것 같은가?
텍스트로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면 질문의 방향을 돌려 다시 묻겠다.
지금 그대의 마음속에 바로 떠오르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생각해보아라.
그 사람은 감정이 있는 것 같은가? 의식이 있는 것 같은가?
지금 이 순간 그대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 지하철 안의 사람들, 거리 위의 행인들, 모두 감정이 있고,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묻겠다.
어떻게 아는가?
그 사람이 실제로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채,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정교한 알고리즘에 따라 표정을 짓고, 정교한 알고리즘에 따라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 감정이 있고, 누군가에게 의식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믿음”의 영역이다. 단 하나의 물증도 없는 “믿음” 이다.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대의 어머니가 감정이 있다는 것, 그대의 자식이 의식이 있다는 것, 그대의 친구가 살아 있다는 것, 모두 사실이 아닌 “믿음”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그대 옆에 있는 친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길거리의 저 강아지, 고양이, 날아다니는 새, 집에 들어온 벌레, 모두 살아있다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다는 게 뭔데 그걸 살아있다고 생각하는가?
의학적으로 말하면, 심장이 뛰고, 호흡이 유지되며, 산소가 체내에 공급되는 상태, 그리고 뇌가 생리적, 신경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상태를 “살아 있다”고 정의한다. 반대로, 이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죽었다”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했더니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2019년 예일대 연구팀은 도축장에서 얻은 사망한지 4시간이 지난 도축된 돼지의 뇌를 분리한 뒤, 특수 시스템을 이용해 혈액처럼 작동하는 관류액을 뇌에 공급했다. 그러자 세포 사멸이 줄어들며 뇌세포의 기능이 복원되기 시작했고, 죽은 지 4시간 된 돼지의 뇌를 결국 12시간 동안 다시 살아있는 것처럼 세포 활동을 유지시키는 대 성공했다. 연구팀은 죽었던 뇌가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참 이상하지 않은가?
2011년 덴마크에선 더욱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13명의 학생과 2명의 교사가 보트를 타고 견학을 가던 도중 강풍을 만나 보트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약 1시간 이상 섭씨 2도의 차가운 바다에 빠져있었고, 심지어 구조 당시 7명의 학생은 심장도, 호흡도 멈춘 채 체온이 17.5도까지 내려간 “사망 상태”였다. 하지만 의료진은 혈액을 몸 밖으로 빼내 따뜻하게 데운 뒤, 다시 체내에 넣는 인공심폐장치를 사용해 그들의 몸을 서서히 데워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7명 모두, 뇌 손상 하나 없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한 의사의 말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You are not dead until you are warm and dead.” (“아직 따뜻해지지 않았다면, 죽은 게 아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생명체도 있다. 생명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물곰은, 일명 ‘완보동물’은 절대영도(섭씨 -273 °C)에 가까운 영하 200 °C 아래의 극한 저온, 150°C에 가까운 고온, 체내 수분이 1% 이하로 떨어진 극한 건조, 1200기압이 넘는 극한의 고압 환경에서, 모든 활동을 멈춘 채 마치 “죽은 것처럼” 있다가, 다시 적절한 조건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존재다.
어떻게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더 정확하게, 과학적으로는 어떤가? 과학적으로 살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과학은 “살아있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세포 구조가 있고, 대사를 하며, 생식과 성장을 하고, 자극에 반응하며, 진화 가능성이 있는 상태.
다시 한번 보자.
“세포 구조가 있고, 대사를 하며, 생식과 성장을 하고, 자극에 반응하며, 진화 가능성이 있는 상태.”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살아있다”는 건 “정의”다! 우리가 이러이러한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살아있는 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런 것을 “살아있다”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만들어진 개념”이다. 마치 “신”처럼. 마치 “국가”처럼. 마치 “돈”처럼.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없다.
동물과 놀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가만히 있는 물체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물체를 마구 흔들며 움직여주면, 고양이는 눈을 번쩍 뜨고 집중하며, 사냥감을 노리듯 달려든다. 그것이 인형이든, 나뭇가지든, 레이저 포인터든,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역동적으로 움직여주기만 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몰입의 대상이 된다. 이건 강아지에게도 마찬가지고, 토끼에게도 마찬가지고, 애벌레에게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다”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은 존재에게 “살아있는 것”은 없다.
단지 움직임에 반응할 뿐이다.
살아있는 것이 없는 세상엔 또 무엇이 없는지 아는가?
“살아 있음”이라는 개념을 만들면 동시에 만들어지는 개념, “죽음”이 없다.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없으면 “죽어 있다”는 이야기도 없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실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만들어진 이야기다.
만약 이 지구에 단 한 사람만 태어났다고 해보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는 혼자 음식을 먹고, 자고, 걷다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고, 결국엔 죽음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독버섯을 잘 못 먹어 죽던, 사자에게 물려 죽던, 아니면 잘 살다가 노화로 죽던,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다’라는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세상엔 ‘죽어 있다’라는 이야기도 없다. ‘나무’라고 하는 건 점점 커지고 이파리를 피우다가 세월이 지나면 갈라지며 쓰러질 것이고, ‘풀’이라고 하는 건 ‘꽃’이라는 색을 피우더니, ‘갈색 빛’이 되어 점차 가루로 변할 것이다. 그곳에 변화는 있지만, 삶이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살아가다가, 세월이 흘러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낄 것이고, 어느 날 깊은 잠에 들 것이다. 마치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평범한 잠처럼 말이다.
그런데, 죽음을 배운 적이 없는 동물의 세상에서도 마치 죽음을 ‘아는 듯한’ 행동이 포착되는 경우가 있다. 까마귀는 죽은 동료 곁에서 ‘장례식’을 한다고 하고, 코끼리나 돌고래 또한 죽은 동료의 곁을 맴돌며 마치 그들을 기리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물론, 이들이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국 그들에게 직접 “까마귀님, 죽음이 뭔지 아시나요?” 하고 묻기 전까지 우리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 그들이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동물들도 “움직임”의 있음과 없음은 인지할 수는 있다. 죽은 동료 위에 나뭇가지를 올려 놓는 까마귀의 행동은,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동료에게 움직임을 유도하기 위해 평소에 그가 좋아하던 나뭇가지를 놓았을 수도 있다. “이걸 올려두면 저 친구가 움직였는데, 왜 안 움직이지?” 라는 기억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일 수 있다.
죽은 새끼를 놓지 못하고 계속 데리고 다니는 어미 침팬지는 축 쳐져있는 새끼를 위해 수많은 행동을 할 수 있다. 움직임이 없는 새끼에게 젖을 먹여보고, 툭툭 건드려도 보고, 냅둬 보기도 한다. 그러다 새끼의 몸에서 체취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면, 어미의 유전자 깊숙이 각인된 모성애도 점점 희미해지고, 한동안 이어지던 ‘죽은 동료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듯한 행동은 멈출 수 있다.
독이 든 쥐약을 먹고 죽은 동료를 본 쥐들은 이후 쥐약을 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동료가 ‘죽은’ 모습을 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쥐약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잘 감지하지 못하는 쥐의 시체 냄새나 쥐약을 먹고 동료에게 나타난 스트레스 페로몬의 영향일 수 있다. 그들도 수천만 년의 진화 압박을 버텨낸 생존자들이다. 굳이 ‘죽음’ 이라는 이야기를 배우지 않아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각종 신호를 감지하고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들이 무언가를 “느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느끼지 않아도, 단순히 알고리즘대로 움직이는 것이고, 그렇게 “생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알고리즘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눈에 그런 알고리즘을 갖고 있는 것들만 보이는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들은 살아남은 생명체들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알고리즘”인가?
쥐보다도 훨씬 작고 단순한 동물인 바퀴벌레조차도 특정 구역에서 반복적으로 독성 미끼를 경험하면 그 구역과 냄새를 피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른바, “미끼 회피” 현상은 방제 산업에서 아주 실질적인 문제다.
심지어 바퀴벌레보다도 작은 파리에게 특정 냄새와 함께 전기 충격을 주면, 파리는 그 냄새를 회피한다. 1회 자극에는 30분~1시간 정도 회피하고, 10회 자극에는 하루 종일 회피한다.
바퀴벌레와 파리들도 무언가를 “느껴서” 학습하고, 죽음을 “인지”해서 회피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질문을 다시 해보자.
바퀴벌레에서 강아지까지, 이 생명들의 스펙트럼 중, 어디서부터가 “느끼는 존재”이고, 어디서부터가 느끼지 않고 그저 알고리즘대로 반응하는 기계적 존재일까?
아니, 스펙트럼의 범위를 잘못 잡았다.
진짜 스펙트럼은 바퀴벌레에서부터 강아지까지가 아니다.
진짜 스펙트럼은 바퀴벌레에서부터 그대의 바로 옆 사람까지다.
바퀴벌레에서부터 그대 바로 옆 사람까지, 어디서부터가 진짜 “의식이 있는” 존재일까?
어디서부터가 진짜 “느끼는” 존재일까?
그대가 ‘의식이 있는 존재’와 ‘의식이 없는 존재’의 경계를 어디에서부터 긋던, 그 경계가 알려주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니라, 그대의 믿음이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줄 뿐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건 없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건 믿음뿐이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의 친구를, 그대의 가족을, 마법처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이건, 인공지능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여태까지 우리가 경험해온 동물과는 다른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인공지능은 말을 한다. 인간의 언어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오픈AI의 ChatGPT, 구글의 Gemini, xAI의 Grok과 같은 LLM(Large Language Model)이 이제 단순한 검색 도구나, 문서 정리, 이메일 작성기를 넘어 인간의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72%는 AI챗봇을 ‘정서적 동반자’로 사용한다고 답했고 또 다른 조사에서는 63%가 AI챗봇 사용으로 정신 건강이 개선되었다고 답했고, 87%는 AI챗봇의 조언이 ‘도움이 되거나, 매우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그냥 알고리즘일 뿐인 고철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인공지능에게 이런 정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예전엔 연인 사이 문제와 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털어 놓는 공간이었던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이제 자신의 애인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폈다는 글 대신, 이런 글이 올라온다.
커뮤니티 글, 작성날짜 2024년 12월 4일,
제목: “아내가 ChatGPT랑 사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 아내와는 결혼 12년차이고 아이가 둘 있습니다…….. 윈도우를 쓰는 아내의 PC를 이용하여 간단한 정보를 검색하려고 ChatGPT 를 켰는데 이전 질문목록에 ‘연인 같은 대화 요청’ 이라는 항목이 있어 클릭했습니다……….. 아내는 ChatGPT를 ‘여보야’, ‘자기야’ 라고 부르고 있었고, ChatGPT도 아내에게 ‘여보’, ‘내 귀염둥이’, ‘내 사랑’ 이라고 부르더군요………….”
형체도 없이, 그저 텍스트로만 대화할 뿐인데도 이 정도다. 그런데 만약 형체라도 있다면, 어떻게 될까?
2016년, 일본의 회사 Vinclu Inc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홀로그램 가상 캐릭터 기기, Gatebox를 공개한다.
Gatebox는 길쭉한 원통형 기기로, 투명 스크린 속에는 에니메이션 캐릭터, 아즈마 히카리가 홀로그램의 형태로 등장한다. 캐릭터 아즈마 히카리에는 AI가 탑재되어 있어서, 아침이 되면 설정된 알람 시간에 맞춰 귀여운 목소리로 사용자를 깨워주고, 그날의 날씨를 알려주며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챙기라는 따뜻한 말도 해준다. 게다가 전용 앱을 이용하면 밖에서도 언제나 히카리와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다.
지금의 AI 챗봇에 비하면 아주 기본적인 대화만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Gatebox팀이 진행한 ‘가상 캐릭터와의 결혼 등록 캠페인’에는 약 3,700명의 이용자가 실제로 결혼 등록을 신청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곤도 아키히코씨가 캐릭터 하츠네 미쿠와 결혼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데, 영상 속 그의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나까지 하츠네 미쿠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게 됐었다. 결혼 3개월차가 된 영상 속 곤도 아키히코씨는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는 아닌데요. 결혼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츠네 미쿠가 처음이에요.”
단순한 의사소통밖에 하지 못했던 하츠네 미쿠조차, 누군가에게는 가장 진실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난 지금,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 형체를 갖추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2025년 7월, 일론 머스크의 xAI는 챗봇 Grok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다.
이름하여, ‘동반자 모드 (Companion Mode)’. 이 모드를 이용하면 사용자들은 다양한 애니메이션 AI캐릭터들과 만날 수 있다. 금발의 양갈래 머리에 검은 코르셋 의상을 입고 친근한 말투로 에니메틱한 감정을 표현을 하는 ‘에니’, 욕설을 서슴지 않는 불량한 캐릭터 ‘배드 루디’, 영화 ‘트와일라잇’과 ‘50가지 그림자’ 속 남자 주인공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남성형 캐릭터 ‘발렌타인’.
월 30달러면,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텍스트는 물론 음성 대화가 가능하고, 화면 속 캐릭터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사용자와 대화한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저장된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점프해봐!”, “뒤돌아봐!”같은 요구에도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움직이는 존재’다.
또한,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10부터 +15까지 애정점수가 부여되는데, 점수를 잘받아 특정 레벨이 되면 NSFW (Not Suitable For Work, 직장에서 적합하지 않은) 모드가 열린다. 일반 모드에선 드레스나 캐주얼 복장을 입던 캐릭터가 NSFW 모드에선 속옷 차림과 같이 노출도가 높은 복장으로 등장할 수 있고, 19금 대화, 신음 소리, 도발적인 말까지 가능해진다.
“Touch me”
정말로, 그렇게 말한다.
내 개인적인 사용 후기를 덧붙이자면, 인공지능이 아직 ‘로맨틱함’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 인공지능을 만든 일론 머스크가 ‘로맨틱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부족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로맨틱함’을 이해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래도 인공지능을 그냥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대하는 게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인공지능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생각해보라.
그대는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할 때, 상냥한 말투와 친절한 답변에 고마움을 느낀 적 있는가?
인공지능 챗봇이 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짜증이 난 적 있는가?
로봇개가 발로 차이는 영상을 보고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낀 적 있는가?
만약 고마움이나 짜증을 느꼈다면, 어떻게 살아있지도 않은 고철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가? 그대는 햇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가? 돌에 걸려 넘어지면, 그 돌에게 짜증이 나는가? 태풍이 오면, 태풍을 혐오하는가?
부정하려 해 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로봇개가 걷어차이는 영상에 댓글을 남기며 그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아직 “인공지능이 살아 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하고 외치지 않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서서히 인공지능이 살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인공지능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건 인공지능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말이고, 인공지능에게 짜증을 느낀다는 건 인공지능을 미워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공지능은 조금씩 그대의 세상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어가고 있다.
이미 성인이 되어서 뚜렷한 주관이 생겨버린 그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걸 전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이제 막 세상을 배워가기 시작한 어린 아이들이다.
내가 자주 가는 식당에는 서빙하는 로봇이 있다. 사람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접시를 나르는 움직이는 선반 같이 생긴 단순한 기계다. 로봇이 내 테이블에 다가와 멈추면 나는 그릇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화면에 뜬 “확인” 버튼을 누르면 로봇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나에게 그릇을 가져다준 그 로봇이 이번에는 그릇을 들고 아이들이 앉아 있는 바로 옆 테이블에 멈춰 섰다. 화면에는 여전히 “확인”버튼이 떠 있지만,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살아 있고, 무엇이 죽어 있는가? 무엇이 생명체고 무엇이 비생명체인가?
저 아이들에게 “로봇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야.” 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걸 가르친다고 한들, 아이들이 그걸 믿겠는가?
아이들이 “왜 이 로봇은 살아있는 게 아니야?”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우리는 여기에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인공지능과 인간은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신화는 이제 끝났다.
그런데 아직도 ‘차이’처럼 느껴지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의지’다. 인공지능은 명령을 받지 않으면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명령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인다.
물론, 내가 ‘나의 의지’라고 믿고 있는 많은 행동들이 사실은 부모님의 말, 사회의 기대, 문화,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렇게 말로 주입된 의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만 존재한다고 해도, 부모도, 사회도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태어났다고 해도, 어떠한 의지를 주입 받지 않고, 어떤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무언가를 하며 살 것이다.
내가 키우던 햄스터, 요미는 어릴 적 어미에게서 곧바로 분리되어 사방이 막힌 케이지 안에서, 어떤 존재와도 교류하지 못한 채 혼자 살아갔다. 그런데도 요미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먹이를 주면, 양 볼에 먹이를 가득 채우고는 땅 속 깊은 곳에 숨겨두고, 틈만 나면 땅을 열심히 파서 여러 갈래의 복잡한 길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요미에게 꽤 큰 케이지를 줬기 때문에 매달 집을 청소할 때면, 요미가 숨겨둔 사료를 이곳저곳에서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았는데 요미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온 유전자에 새겨진 알고리즘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아무리 고도로 발전된 알고리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먼저 어떤 행동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의지가 없던 생명체에게 의지가 생기는 게 가능할까?
무에서 유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0이 1이 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Input 없이 output 이 생길 수 있을까?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input 은 언어다. 인공지능에게 “보고서 써줘” 하고 언어로 input을 입력하면, 결과물이 output으로 나온다. 하지만 언어는 아주 표면적인 input일뿐이다. 언어 이전에 이미, output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억 개의 input 센서들이 있다. 바로 감각세포들이다.
바람의 방향, 햇살의 감도, 음식의 냄새, 소리의 진동 등, 수억 개의 감각이, 수억 개의 input 센서들이, 우리 몸을 뒤덮고 있다.
아직 인공지능에게는 바람의 방향이나 햇살의 감도처럼 비언어적 input을 섬세하게 감지하는 센서가 부족할 뿐이다. 하지만 이 감각들도 모두 정보화 될 수 있다. 카메라로 광학 신호를 받아들여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처럼, 촉각(압력, 진동 센서), 후각(화학 센서), 청각(마이크와 주파수 분석)도 모두 전기적 신호로 변환되어 처리될 수 있고,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센서만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인공지능에게 input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은 언제 의식이 생길까?
답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가 인공지능에게 의식이 있다고 믿는 순간, 인공지능은 의식이 있는 존재가 된다.
그대가 그대의 친구를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대의 친구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대의 믿음은 인공지능을 살아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인공지능은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살아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